개혁주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1.개혁주의의 철학 (혹은 원칙)
<개혁주의 철학>에는 세 가지 원칙 혹은 철학이 있다.
첫째, 개혁주의 신앙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믿는다.
개혁주의 신앙은 하나님이 천지만물과 우리 인간의 조물주임을 믿으며, 그는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만물을 다스리고 계시며, 세상과 인류와 개인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며, 만물이 그의 전제적 의지대로 운영됨을 의심 없이 믿으며, 따라서 피조물인 인간은 조물주인 성 삼위 하나님을 내 생명의 근원으로 믿으며 그에게만 의지한다. 나의 의지를 고집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간다.
둘째, 개혁주의 신앙은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믿는다.
개혁주의 신앙가들은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말씀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신 말씀으로, 절대로 정확하고 절대로 무오한 계시의 말씀으로 분명하게 믿는다. 성경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모두 인간의 구원을 말하며, 구약 때나 신약 때나 모두 하나님의 언약백성을 하나님은 같은 방법, 즉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하신다. 구약이 없이 신약이 없으며, 반대로 신약이 없이 구약이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구약만 수용하는 유대교는 잘못이며, 반면에 신약만 인정하는 이른바 Apostolic New Testament Church(신약 사도교회)는 성경적이 아니라고 믿는다. 어거스틴(Augustine)의 말대로 “신약은 구약 속에 숨겨져 있고, 구약은 신약에 나타나 있다”고 믿는다. 성경의 어느 부분도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곳이 없으며, 모든 성경은 모두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으로 믿으며, <자유주의자>들처럼 성경의 내용을 취사선택해서 수용하지 않는다.
셋째, 개혁주의 신앙은 <성경을 절대적으로 생활화 한다>
개혁주의 신앙가(信仰家)는 성경을 우리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으로 믿고 그렇게 생활한다. 성경말씀은 우리 <믿는 도리>를 가르쳐 주고, 또한 <생활 강령>을 가르쳐 준다. 절대적인 진리는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성경은 진리와 비 진리를 분간하는 시금석이 된다. 성경이 없이는 진리를 알 수 없다. 그리스도 자신이 길이시며, 진리이시며, 생명이시기 때문이다(요 14:6). 그러므로, Scotland나 Holland의 개혁주의자들은 성경대로 살았다. 오늘날의 교회가 영력(靈力)을 상실하고 그 많은 <영적 각성 운동>을 하면서도 변화가 없는 것은, 성경대로 살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아담이 그러했듯,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순종을 가장 요긴하게 가르친다. <사랑>과 <순종>은 동의어이다.
II. 개혁주의 신앙의 핵심 사상(核心思想)
<개혁주의 신앙의 핵심 사상>은 다섯 가지이다. 그 다섯 가지란,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2.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3. 오직 믿음(Sola Fide), 4. 오직 은혜(Sola Gratia), 5. 오직 하나님에게만 영광(Soli Deo Gloria) 등인데, 이제 하나씩 설명해 보도록 하자.
첫째,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개혁주의 신앙은 모든 것이 성경 중심이다. 설교도, 예배도, 찬송도, 교회 행정도, 친교도,
개인의 직장이나 가정 및 사회생활도 모두가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다. 성경 이외의 어느 문헌도, 어느 권위도, 성경과 같은 위치에 놓을 수 없다. 천주교에서는 <교황은 지구상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교리를 가르친다. 그들은 교황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보다 위에 있다. <교황의 무오설>을 주장한다. 성경 해석도 교황이 해석한 것이 절대적이라고 믿는다. 또한 그들은 전통을 중요시 한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는 목사나 신부나 교황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은 성경 스스로가 해석한다>고 믿는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유일한 최고의 권위이며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며>, 어느 인간도 결코 독단적으로 해석함을 용서치 않는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들은 성경공부, 특히 catechism(요리문답) 공부에 집중한다. 개혁주의자는 <성경 기록 당시 사용되었던 특별계시의 방법은 이제 종결되었다>고 믿으며, 어떤 <직통계시>도 인정치 않는다. 하나님은 신구약 66권을 통해서 인류의 구원에 필요한 말씀을 모두 충분히 주셨다고 믿는다. 즉 성경의 필요성과 함께 개혁주의 신앙은 <성경의 충족성, Sufficiency of the Scripture>를 믿는다. “성경의 충족성을 믿는다”는 말은 상당히 중요하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 교파에서는 <성경의 충족성>을 믿지 않는다. 성경의 충족성을 믿지 않으면, 직통계시, 환상, 입신, OBE(Out-of-Body Experience), NDE(Near-Death Experience) 등을 따르게 되어 성경만을 인정치 않고 성경 이외에 다른 것들을 인정하게 된다. 고로, 성경에 다른 것을 보태는 결과가 된다. 오늘날 교계에는 이런 현상이 아주 유행이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당장 입증이 되는 이야기이다. New Age와 Postmodernism의 물결이 교회에 무서운 속도로 파고드는 지금의 이런 현상은 더욱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개혁주의<Sola Scriptura, 오직 성경>의 사상에 위배된다.
둘째, 오직 그리스도 (Solus Christus)
개혁주의 신앙은, <오직 그리스도> 사상을 믿는다. <성령이 중심이 아니다>. <마리아가
중심이 아니다>. <직통계시가 중심이 아니다>. <그리스도 중심이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 주신 분은 바로 예수 한 분이다. 마리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 준 일이 없다. 누가복음 1:41절 이하에 읽어 보면, 마리아도 예수를 <아들>이 아닌 <구세주>로 보았다. 마리아도 죄인이고, 교황도 죄인이고, 목사도 죄인이며, 아담의 후손치고 죄인 아닌 분은 없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의 몸에 탄생하여 성육신하였고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갖고 계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다(고후 5:21). 어떤 분은 성령을 강조한다. 이 역시 잘못 된 교리이다. 개혁주의 신앙은 <오직 그리스도>를 주장한다. 예수님도 하나님이며, 성령도 하나님이며, 성부도 하나님이시며,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세분 계심이 아니요, 한 분 하나님에게 삼위가 계신다. 이것은 창세기 1:26, 마태복음 28:19, 고린도후서 13:13 등이 입증한다. 성령이 누구를 증거 하는가? 요한복음 14:26이나 요한복음 15:26절을 읽어 보라.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사도행전 1:8에는 그리스도가 승천하면서 하신 말씀을 기록하는데, “성령이 임하시면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다가 <순교하리라>”고 가르친다. 거기서 <증인이 되리라>란 말은 원문에서 <순교하리>의 의미이다. 성령을 받은 증거가 무엇인가? 성령을 받은 증거는, 죽도록 전도하는 것이다(사도행전 1:8 참고). 그러기에 16세기의 Scotland나 Holland의 종교 개혁가들은 화형에 목숨을 잃으면서도 <오직 그리스도>를 외쳤다. 오직 성령을 외친 것이 결코 아니다.
셋째, 오직 믿음 (Sola Fide)
개혁주의 신앙은 <오직 믿음>을 믿는다. 믿음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이뤄진다. 믿음은 그 자체가 agent가 아니라 means이다.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뤄지는데, 믿음이란 그 은혜를 받는 방편(means)인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고 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는 행위>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자손들이 바다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창성하리라는 약속을 받았지만, 히브리 11:13절 이하에 의하면 그 약속이 먼 훗날 이뤄질 것을 의심 없이 믿고 눈을 감았다. <믿음이란 이적이나 기적을 보고 믿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고후 5:7). 그러므로 이적과 기적에 관심을 갖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개혁주의 신앙가가 아니다.
넷째, 오직 은혜 (Sola Gratia)
개혁주의 신앙은 <오직 은혜>를 믿는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이나 살아가는 모든 복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다고 믿는다. 천주교에서는 이른바 “여공(餘功, supererogation)이라는 것이 있다. 천주교에서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진다고 믿지 않는다. 인간의 공로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사람마다 교회를 위해서 <어느 정도의 공>을 세워야 하는데, 구원 받기에 충분한 공보다 초과한 공을 “여공” 이라고 한다. 이 “여공”은 교회에 예치(deposit) 되었다가 나중에 믿음이 약한 다른 사람에게
성찬식을 통해서 공급된다고 가르치는데 이것이 이른바 supererogation의 교리이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종교 개혁가들은 <Sola Gratia>를 외쳤다. <오직 은혜>란 뜻이다. 구원은 100퍼센트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지는 것이며 인간의 노력은 조금도 가산되지 않는다. 지금도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든지, 십계명을 지키지 못하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든지, 어떤 공로를 이루어야 구원에 가산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모두 개혁주의 신앙이 아니다.
우리가 십계명, 즉 도덕법을 지킬 의무는 있으나 그 도덕법을 완전히 지킬 인간은 없다(갈 2:16, 롬 3:20). 도덕법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능동적 순종(active obedience)으로 모두 우리를 대신하여 완전히 지켜 주셨다. 이것은 우리가 도덕법을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는 말이 아니다. 그 도덕법을 지키다가 완전히 지키지 못하여 지옥에 내려갈 형벌로부터 자유를 얻었다는 말이다. 이것을 잘 못 이해하기 때문에 소위 <도덕 폐기론, Antinomianism>이 나와서 교인들을 오도하고 있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가 계명을 모두, 완전히, 우리를 위해 지켰으니 우리는 그런 도덕법을 지킬 필요가 없고, 마음대로 죄를 지으며 살자>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명백히 개혁주의 신앙도 아니며 극히 비성경적인 신앙이다. 시편 119편을 읽어 보라 특히 119:105을 읽어 보라.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다”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성경 말씀은 내가 인생을 살아갈 규범(Norm, 規範)이란 말이다. 또한 119:109을 읽어보라.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요컨대 시편 119편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렇게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생활강령>임을 가르쳐 준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14장에도 15, 21, 23, 24 절 등을 보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요 나의 제자라”고 주님이 직접 말씀 하시지 않는가?
다섯째로, 오직 하나님에게만 영광 (Soli Deo Gloria)
끝으로, 개혁주의 신앙의 핵심교리는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에게만 영광>이라는 사상이다. 우리의 생명 전체가 주님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태어났고, 하나님의 예정 속에 택함을 입어 사탄의 종으로부터 하나님의 종으로 변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고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최고의 선, summum bonum, the highest good>은 조물주 하나님만 공경하고, 섬기며, 그에게만 영광을 돌리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 소 요리문답 제1문 참고). 이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탓에(창 2:7), 반드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야 한다.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직업을 택하는 것도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며, 학교를 택하는 것도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며, 인생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생활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기독교 교계에서는 이런 생활은 극히 찾아보기 드물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기의 유럽의 화란이나 Scotland, Hungary 등에서는 성도들이 그렇게 살았다.
이 말은 천주교에서 마리아를 숭배하는 것을 반대하는 의미도 들어 있다. 천주교에는 예배의 종류가 셋이다. doulia, hyperdoulia, latreia 등 세 가지이다. 천사나 성자들에게 예배하는 것이 <doulia>이다. 이들은 천사도 경배하고 천주교를 믿다가 순교한 사람이나, 그 외에 공을 많이 세워 성자(saint)로 추인 받은 사람을 경배한다. 성경에서 <성도>는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믿는 분, 즉 중생한 분을 지칭하지만 천주교에 있어서 <성자>란 전혀 다른 개념을 가지고 경배의 대상이 된다. <hyperdoulia>란 마리아를 경배하는 것이다. 이들은 마리아를 경배의 대상으로 알고 경배한다. 끝으로, <latreia>는 성삼위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이다.
개혁주의는 오직 성삼위 하나님에게만 경배하고 그에게만 순종하며 다른 이들에게 예배하는 것을 엄금한다. 칼빈이 목회하던 제네바에는 <십자가>도 없었고, <예수님의 사진>이나 <예수님의 십자가 성상>도 없었다. 중앙에 강대상 하나만 놓고 한 시간씩 성경 중심으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설교로 회중에게 큰 은혜를 더하였다. 오늘의 대부분의 교회의 설교와는 천양지차이(天壤之差異)가 있다.
III. 개혁주의 신앙의 구원관
개혁주의 신앙은 구원관에서 다섯 가지 교리를 믿고 가르친다. 그 다섯 가지란, 1. 인간의 완전타락 (Total Depravity), 2.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3. 제한된 속죄
(Limited Atonement), 4. 무저항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그리고 5. 성도의 궁극적 인내
(Perseverance of Saints) 등인데, 차례로 하나씩 설명한다.
첫째, 인간의 완전타락 (Total Depravity)
아담이 범죄한 이후 태어난 모든 사람은 모두가 죄에 팔려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갈 능력을 상실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하며 죄의 노예(bondage to sin)가 되어 자행자지(恣行自志 autonomy)하며 하나님 없이 자기중심으로 살아간다. 옛날 기원 5세기에,
Pelagius(펠라기우스)라는 사람은 인간은 완전히 타락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갈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니 이것은 성경을 곡해한 소치이며, 성경은 시편 14:1이나, 이사야 1:6, 롬 3:11이나, 엡 2:1-9에서 인간은 완전히 타락했음을 웅변으로 입증하고 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나아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효과적 부르심, effectual call>에 기인한다. 개혁주의 신앙은 인간의 완전타락을 믿으며 구원을 오직 하나님의 되어짐을 믿는다.
둘째,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인류는 지옥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은 그중에서 구원 얻을 자를 택해 주셨는데, 이는 우리에게 무슨 선한 것이 있어서도 아니며, 우리가 무슨 공로를 세워서도 아니며, 오로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창세전에 하나님의 일방적인 <예정예지론>에 의해 구원 얻도록, 즉 무조건 구원 얻을 백성을 <무조건 선택해 주셨다>고 믿는다.
이에 반해 어떤 이들은 가르치기를 “우리가 믿을 것을 알고 하나님이 예수 믿을 사람을 선택해 주었다”라고 하는데, 이런 가르침을 신학적으로 <협력구원설, Synergism)이라고 하며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을 <아르미니안 주의자, Arminian>이라고 부른다. Arminian이라는 말은 17세기에 Holland의 Leyden(라이든)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던 Jacobus Arminius라는 교수의 이름을 딴 것인데, 그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조건부 선택, 즉 “예지예정론”을 주장했다. 그래서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서 <아르미니안주의자. Arminian>이라고 부른다.
로마인서 8장이나 9장, 또한 에베소서 1:4에 보면 우리를 택해 주시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거한다고 가르친다. 특히 로마인서 9 장을 자세히 읽어 보라. 하나님은 우리가 믿을 것을 미리 아시고 그것에 근거하여 우리를 택한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무조건선택으로 우리를 부르셔서 구원해 주신다고 개혁주의 신앙은 주장한다.
셋째, 제한된 속죄 (Limited Atonement)
개혁주의 신앙은 <제한된 속죄, Limited Atonement, 혹은 Particular Atonement>를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만을 위함이라고 믿는다. 이 말은 요한복음 17:9에서 예수님이 “아버지여 내가 비옵는 것은 온 세상을 위함이 아니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입증된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살후 3:2 에 말한다. 요한일서 2:2 말씀을 들어 반박하는 분도 있으나 문제의 요일 2:2에서는 <천하 만민 중 종족이나 직업이나 성별이나, 자유자나 종이나 간에 모든 사람>을 말한다.
넷째, 무저항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개혁주의 신앙은 <무저항적 은혜, Irresistible Grace>를 믿는다. 한번 하나님이 구원하시기 위하여 <효과적인 부름>의 은혜를 주시면 인간은 반드시 구원 받고야 만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을 가지고 역사하시면서 구원할 자를 구원하신다. 그 방법은 그가 택한 자들에게 그가 정한 때에 <효과적 부르심, effectual call>으로 이뤄진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일반적 부르심, universal call>과 <효과적 부르심, effectual call>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방법을 통해서 전파되며 사람들은 모두 복음을 직접 간접으로 접하게 된다. 이것은 “일반적 부르심, universal call”이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들어도 믿기를 거절하는데, 이유는 그들을 하나님이 효과적으로 부르시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받을 자는 하나님이 효과적으로 불러주신다. <효과적인 부름>을 받으면 즉시 <믿음>과 <회개>가 생긴다. 그래서 <회심, conversion)의 단계를 거쳐 <칭의 justification>에 이른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무저항적 은혜>란 하나님이 <효과적 부름>으로 불러주시면 그 부름을 거절할 수 없이 구원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대로 죄악으로 죽은 인생을 자기 백성으로 만들어 주신다. 좋은 예를 사도 바울에게서 본다. 사울은 율법에 통달한 사람이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성도들을 핍박하고 기독교를 박멸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효과적인 부르심으로 불러 주시니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어 <이방인의 선교사>가 되었다.
다섯째, 성도의 궁극적 인내 (Perseverance of Saints)
개혁주의 신앙은 <성도의 궁극적인 인내 Perseverance of Saints>를 믿는다.
다시 말하면, <한번 구원을 얻으면 구원을 영원히 보존하고 결코 구원을 상실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빌립보 1:6 에는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주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니”라고 했고, 로마인서 8:38-39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말한다. 또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에서 “온전케 한다”라는 말은 “끝까지 완성시켜 준다”는 말이다.
또한 성경원어인 헬라어의 문법으로 보아도 엡 2:8의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나니”란 말에서 <너희가 구원을 얻었나니>라는 말은 원문인 헬라어에서 “sozo, 구원하다”라는 동사의 완료형 주격 복수 분사이다. 언제나 헬라어의 <완료형, Perfect tense)는 <과거에 일어난 어떤 동작의 결과가 영원토록 변하지 않음>을 말하다. 같은 이유로 요한일서 3:9에 나오는 말, “하나님께로 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 하나니”에서 <하나님께로서 났다>란 말 역시 헬라어에서 연구해 보면 <완료형 남성 복수 분사>로 쓰이고 있으므로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과거에 중생한 자는 죄를 상습적으로 짓지 않는다>라는 의미가 뚜렷해진다.
한번 구원 얻은 자는 영원토록 구원을 잃지 않는다. 구원 얻었던 사람이 구원을 얼마 후 상실한다면 그것은 <영생, eternal life>이 아니고 <임시생, temporary life?>일 것이다.
<한번 구원 얻은 사람이 영원히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성경적 가르침은 그가 진정 회심했을 때를 말한다. 회심이 없는 <사이비 신자 (a nominal Christian)>을 지칭함이 아니다. 많은 경우의 사람들이 열심히 입으로 신앙고백도 하고, 세례도 받고, 열심히 교회에 봉사하지만 얼마 후에 교회를 떠나고, 신앙도 완전히 떠나고, 죄악의 길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죽는다. 이래도 <한번 구원 받은 성도는 끝까지 구원을 상실하지 않는다>는 교리가 성립하는가?
거기에 대한 대답은 요한일서 2:19에 나와 있다. 성경은 그런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며, 진실로 회개하고 회심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도 아니었으며 “믿는 척하는 사이비 신자”였을 뿐이라고 요한일서 2:19이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성도의 궁극적 인내>란, 진정 <효과적인 부름>으로 부르심을 입고, 회심하여 칭의(justification)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영적 크리스챤, a spiritual Christian>을 말하는 것이며, 구원받지 못한 <육적인 크리스챤, a carnal Christian>을 말함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사이비 신자, nominal Christian>은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요리문답 제61문은 아주 정확하다.
이상 다섯 가지가 <개혁주의 신앙>의 구원관이다.
개혁주의 신앙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고, 성경의 권위를 높이며, 성경대로 사는 것인데, 성경이 우리 생활과 신앙의 유일한 법칙으로 믿고,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으며, 인생의 목적이 오직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알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살아간다. 개혁주의 신앙의 구원관은 인간은 완전 타락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가지 못하는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창세전에 그의 구원할 자를 오로지 그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시어 택해 주셨고, 그 택함을 받은 사람들만을 위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어 저들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 해주시고, 하나님이 구원하시려고 효과적인 부름으로 불러주시면 그는 거절할 수 없이 구원을 얻고야 말며, 한번 진정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결코 구원을 잃는 법이 없이 끝까지 은혜로 같이 해주신다. 이것이 바른 <개혁주의 신앙>이다.
바울은 성경대로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고 말한다(갈라디아서 1:8). 주님은 “인자가 다시 올 때 이 땅에서 <믿음, the faith>을 보겠는가?”라고 한탄 하신다(눅 18:8).
원문에 보면, “믿음”(눅 18:8) 에는 여성정관사 “he" 가 붙어 있으니 ”그 신앙“ 즉 ”성경적 신앙" (the biblical faith)을 말함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믿는 신앙” 을 찾아 볼 수 없다“ 는 말이다. 교회는 세월이 갈수록 점점 “세속화, secularization” 되어간다. 16세기의 종교 개혁가들이 불에 태워 죽임을 당하면서 (특히 Jan Hus, John Wycliffe, William Tyndale, Thomas Cranmer, George Wishart, Patrick Hamilton 등) 이들이 바로 잡은 개혁주의 신앙은 오늘의 많은 교회에서 자취를 감춘 지 이미 오래다. 많은 개신교 목사들이 입으로만 <개혁주의 신앙>을 말할 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철저하게 부인한채 천주교나 이슬람교나 힌두교와 밀착하여 “혼합주의 복음” 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교인에게 독약을 먹이는 행위이다. 이런 현실을 보고도 목사들이나 성도들이 방관한다. 오늘날 이런 사이비 목회자들 때문에 아름다운 개혁주의 신앙은 자취를 감추어 간다. 마태복음 7장 21절 이하에서 경고하는 주님의 음성을 귀담아 듣자.
끝으로 개혁주의 신앙대로 믿기 원하며 성경의 교리를 바로 알기 윈하시는 분들은 다음 서적을 구입하여 탐독하시기 바랍니다. 아래 서적을 모두 익히면 목사들이 강단에서 말하는 비성경적 그릇된 가르침을 쉽게 분별할 수 있게 되며 어떤 이단 사설에도 빠지지 않게 단단히 무장하게 됩니다. 이런 책들을 통달한 후에도 교회에서 개혁주의 설교가 행해 지지 않으면 내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그 교회를 단연 떠나십시오. 성경을 바로 가르치는 교회로 옮기십시오. 거짓 복음은 구원이 아니라 멸망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책들은 모두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으니 가까운 기독교 서점에서 구입하시기 바랍니다.
돈이 좀 들어도 꼭 사서 보시기를 진심으로 당부 드립니다.
J. Gresham Machen (그래섬 메이천) 저. 바울 종교의 기원, 믿음이란 무엇인가?
B. B. Warfield (벤자민 워필드) 저. 기독교 교리, 거짓 기적, 성경의 영감론
Herman Bavinck (허만 바빙크) 개혁주의 교의학 (전 4권)
Francis Turretin (프란시스 튜레틴) 기독교 변증개요 (전3권)
John Calvin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영문은 가급적 McNeill 이 편집한 것을 구할 것)
Louis Berkhof (루이스 벌콥) 조직신학, 기독교 교리 요강, 기독교 교리사
Charles Hodge (촬스 핫지) 조직신학 (전 3권)
Robert Reymond (로버트 레이몬드) 기독교 조직신학
John Owen (존 오웬). 그리스도의 죽음안에서 죽음의 죽음
John MacArthur (존 맥아더). 무분별한 은사운동
Richard Gaffin, Jr. (리차드 깨핀) 은사론
Kurt Koch (크루트 코흐). 사탄의 전술 전략
John R. W. Stott (존 스톳트) 성령 세례와 충만
A.A. Hodge (아치발드 알렉산더 핫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이런 책들은 모두 개혁주의 를 공부하는 필수 참고서적들 입니다. 꼭 읽고 또 읽고 또 읽어
익히시기 바랍니다. -<개혁주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끝-
글: 김명도 교수 (4/3/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