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라고 함에 있어서.. 견해를 달리하는 것은..
번호 : 3109 글쓴이 : 이명신
조회 : 21 스크랩 : 0 날짜 : 2003.12.18 17:51
교회라고 함에 있어서.. 견해를 달리하는 것은..
먼저 웨슬리가 영국을 구했다는 말이 있음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가 구했는지에 대한 확신은 자의적일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해봅니다. 그렇게 말함은 이미 그의 실재론에 대한 분명함이 없기 때문입니다.(이 말에 대하여서는 웨슬리의 신학적 계보라는 것이 알미니우스적인 입장의 계보를 따르고 있으며 아르미니우스는 자존의 하나님을 믿지 않고도 참 하나님을 믿는다는 분명하지 못한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결과라는 평가에 대하여서.. 그렇게 외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함에 동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의 이유라고 하는 것이 교회를 잘못 이해하였다고 하는 것과 그것에 대한 안티적 비판이라고 함은 오히려 달리 생각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인용)
'교회는 조직이나 제도가 아니다. 공동체이거나 사귐이다.
권위주의적 제도로 굳어진 교회는 곧 쓸모없는 문화예술의 조직적 형태로
갇혀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교회에 대한 성경적 개념으로 보면 교회는 복음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이다.
동시에 인간이 만든 교회당 건물이나 제도, 구조는
그 자체가 교회도 아니며 그 자체가 신성한 것도 아니다.
교회당 건물과 제도는 참 교회가 아닐뿐만 아니라 거짓 교회일뿐이다. '
인용끝)
이러한 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예견되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사야서 마지막 부분에서는 하나님이 예배당에 갇혀있는 것같이 생각하게 되어지는 것임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있어서 이러한 것에 정당함을 부여하는 신학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바로 철학적 현대주의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의 구체적인 것은 하나님을 원역사 속에 있는 삼위라는 갇혀진 신.. 거의 중세적 개념으로 일관하는 바르트의 신관과 관련되어진 시간관이 그것인데..
그러한 시간이라고 함이 무상의 시간에 들어와서 일반적인 시간과 공간이라고 함을 구별하여서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이 앞서 에노쉬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인 성경해석 in과 among 해석과 같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또한 분리주의자들 특히 무교회적인 입장을 취하는 정당함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사실 하이데거의 철학적 언어의 존재와 그 진리관에서 출발하며 그러한 가운데서 분리적 개념으로 말하게 되어지는 바르트의 사상적 입장을 주장하게 되어짐을 말합니다.
이것은 앞서 에노쉬님의 글을 비판함에 많이 다루었으므로 참고하시기를 바라고.. 철학의 기계적 종말론에 따른 기계적 분리라는 개념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자신의 기름부으심이라는 메시아 사상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을 지적해둡니다.
즉 무교회주의자들도 마찬가지라고 함을 말해둡니다. 즉 이사야 2장 2절과 미가서 4장 1장이하에 있게 되어지는 목가적 개념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언어에서만 출발하기 때문에 자기들의 정당함을 말할 수 있을 것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안티적 개념으로 제도적 교회의 모습의 실재를 생각하지 않고 제도적 교회는 잘못되었다고 단정짓는 것은 또다른 극단적 분리주의자들밖에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보편교회를 이해하면서..
중세에서는 로마교의 지역적 또는 조직적 개념의 제도적 개념에 속하는 자들이 보편교회에 속한 것이며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입장을 취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터툴리안의 법사상 이해.. 취득시효라고 하는 상대적 법적 사상과 관련되어있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들의 조직 자체와 그러한 건물적 개념의 상관성에서 보편을 말하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보편교회(cathoric)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대하여서는 루터와 칼빈이 상대적으로 구교의 보편교회(cathoric Church)라는 것에 같이 반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루터의 입장에서는 반대함에 있어 옳았지만 그의 실재론에 있어서는 이미 그 반대의 분명함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종교개혁자들의 성례관이라고 하는 것의 차이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특히 이러한 차이는 분명 오늘날에 그러한 교회관의 차이와 또한 비판을 불러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1) 성례관의 차이와 의미에 대하여서..
루터의 성례관.. 특히 성만찬이라고 하는 것은 카돌릭의 화체설(사제가 축성하면 실제로 떡이 예수님의 몸과 피가 된다는 설)을 부인하는 가운데서 실재가 현실적인 실재의 모습의 덩어리로서 분포되어진다는 그러한 '공제설'을 말했습니다. 좀 쉽게 표현한다면.. 강낭콩이 든 백설기 떡을 비교할 수도 있겠습니다.
칼빈의 성례관.. 이는 영적 임재설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어지는데 이는 화체설이라는 물리적 변화라고 함이 아니라.. 메시아의 기름부으심과 같은 그 성별적 정당함에 따라 그 떡과 포도주가 비록 예수님의 몸과 피로 바뀌지 않더라도 그것으로 간주함에 실재적 정당함을 찾는 것을 말할 수 있다고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하는 그 차이라고 하는 것은 ..
루터는 그 실재라고 함이 성별적 정당성에 따른 실재라고 함을 말하기 보다는 일단 실재라는 것을 가정하는 것과 그것이 떡 가운데 있게 된다는 개연적 입장을 취하였던 것입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루터의 공제설이 실재론적 입장이라는 점에서 칼빈과 같이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그러나 그 실재라고 함이 그 정당성 문제를 시비하는 그 자리에서는 구분되어진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게르만 민족의 사상적 통일성에 대하여서..
독일 철학의 기본적인 특성이라고 함을 말한다면 통일성 그것이 될 것입니다. 칸트 이후에 피히테와 특히 헤겔적인 측면에서의 종합이라고 하는 것은 전체를 말하는 가운데서의 하나를 말하는 것으로서의 특성적 입장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종교개혁의 입장을 하나님의 말씀의 실재적 정당함을 찾는 것에서 봄이 본질적인 경우이면서도 허용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정황적 것을 살펴볼 때에 게르만민족성이라고 하는 것이 선히 사용되었음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로마로 헌금이 이동되어지는 것을 그 독일 그 나라에서는 좋게 보지 않았고 그러한 것은 루터의 입장을 지지하고자하는 정황적인 힘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것이 하나님의 일반적인 역사로 인한 역사이해의 한 부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지금도 계속되어지는 경향을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제자가 스승을 비판하여서 그 새로운 학설을 내놓은 것이 기본적인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고 또한 루터란의 일반적인 역사철학들을 살펴보면 그 역사이해를 '발전적 개념'에서 이해하지 않고 '종속적 개념'으로 일관하는 경향이 아주 강합니다.
물론 롤란드 베인톤과 같은 자들은 객관성을 말하려고 하는 것에 있어서 정직하다고 할 수 있고 그와 상벽을 이루고 있다고 하는 윌리암 캐논은 역시 종속적인 역사관이 아닌 공정한 입장에서 말하기도 함의 예외가 있지만 말입니다.
이러한 것의 신학적 경향을 말한다고 하면 즉 바르트와 같은 신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원역사와 무상의 시간이라고 함에 개입되어지는 것과 같은 것들.. 이러한 것은 기계적인 경우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칼바르트의 신관을 인용하면서 융엘이 '죽음의 신학'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도 하나님이 세상 속에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이 관여하지 않은 특정한 지역도 있다는 점을 열어놓았고 이러한 것은 분리적 개념에서 실재를 말할 수 있다는 다원주의에 대한 답변도 못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고 안티라는 개념이 실재를 가질 수 있는 것으로 해석의 정당함을 허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분리적 개념의 하나님나라의 임함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이것은 현대주의자들의 'in'과 'among'이라는 것의 기계적 분립을 말함으로써 제도안이라는 것과 제도 밖이라는 이분적 사고를 이루어왔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제도적 교회안 제도적 교회 밖.. 이런 식으로 정도면에서 절충적 묘안을 위한 안티는 교회를 분리주의적 개념으로 이해할 뿐 진정한 실재를 예수이름의 기름부으심 메시아 안에서의 성별적 실재를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3) 보편교회와 지역교회의 상관성이해에 대하여서..
이미 말했던 것과 같이 '보편교회'라는 것을 '카돌릭교회'(cathoric Church)로 이해함은 옳은 것이 아니라는 점은 종교개혁의 후손들로서의 개신교에서는 공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지역교회라고 함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러한 것은 지역교회라고 함 자체가 보편교회가 될 수 없고 '중세의 지역교회와 조직의 보편'과 달리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전체'이라고 함을 기억할 때에 그러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시대를 따라서 그 지역교회에 한 부분적 자리를 매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즉 지역교회가 교회일 수 있는 것은 주의 택한 백성들로서의 성도들이 그 회원으로서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그들의 믿음의 성별적 존재인식과 구별이 지역교회의 실재를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제도적 교회는 전적으로 배척해야 한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선포되어지는 그 정당함에서 비록 가라지가 있다고 하여도 그 말씀이 증거되어지는 가운데서의 그 택한 백성들이 있다는 그러한 보편교회로서의 정체성에 힘입어 지역교회의 실재성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현대주의적 신학의 입장에서 안과 밖이라고 함을 물리적으로 나누는 가운데서 제도적인 것에 전적 비판이라고 하는 안티는 구별적 성별을 말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제대로 된 교회의 실재를 말하지 못하고.. 잘못된 무교회주의자들을 양산하게 된다는 점을 말해둡니다.
그리고 현대철학적 신학에서는 기계적 종말론으로 인한 분리적 안티를 말할뿐 그럼에도불구하고 진정한 성별에 따른 실재를 말하는 구별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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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교회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선포되어지는가 하는 것이 윤리적 판단이라고 함을 앞선다는 점과 배척적인 개념의 상대적 성결을 앞서며 판단하는 것이라는 점을 말해둡니다.
잘못된 복음, 잘못된 교회개념
번호:3103 글쓴이: 향기
조회:23 날짜:2003/12/18 14:43
.. 요한 웨슬리의 일기를 읽으면 그가 얼마나 자주 새벽 5시나 아침에
시장에 나가 설교하였는지를 보여준다.
웨스리는 많은 젊은 사람들이 전통적 교회에 참석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교회당에 오지 않을때는
교회가 일터나 현장으로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웨슬리를 전후해서 올바른 복음을 전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결과는 대단치 못했다.
왜인가?
이유는 그들의 메시지가 잘못된 교회 개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건물안에 갇혀있던 기독교를 끌어내어
빈민촌의 걸인들, 탄광의 광부들, 거리와 시장에서 병든자, 주정뱅이,
부정한자, 창녀들과 감옥의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함께 예배를 드렸다.
레슬리 마스톤 감독은 그가 미친사람이라 불리웠다고 기록한다.
교회는 조직이나 제도가 아니다. 공동체이거나 사귐이다.
권위주의적 제도로 굳어진 교회는 곧 쓸모없는 문화예술의 조직적 형태로
갇혀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교회에 대한 성경적 개념으로 보면 교회는 복음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이다.
동시에 인간이 만든 교회당 건물이나 제도, 구조는
그 자체가 교회도 아니며 그 자체가 신성한 것도 아니다.
교회당 건물과 제도는 참 교회가 아닐뿐만 아니라 거짓 교회일뿐이다.
그러므로 성도로 구성된 진짜교회는
융통성이 있고, 동적이며, 건물안에 갇혀 있지 않아야 한다.
건물 중심이 아닌 살아있는 것이라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교회가 조직과 프로그램에 의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영적 은사를 행사함으로 살아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비극적인 현실은 현대의 제도적 교회는
영적 은사의 사용에 대한 여지를 거의 주지 않는다.
교회는 삶의 총체로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가 평등한 사귐을 갖도록 해야하며 기술에 의해 전락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한다.
말씀에 대한 지식과 실천적 응용,
영적 은사의 신비성과 깊은 경험이 함께 있어야 한다.
ㅡ새포도주는 새부대에ㅡ중에서 발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오직
교회당 안에 있는 제단이나 거기서 드리는 찬송이나 성경봉독
희생헌금이나 예배 같은 것에만 상관이 있다는 생각은
의심할 바 없이 '사단의 가장 사악한 궤계에 불과하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오직 교회 조직 안에서만, 혹은 주일날
교회당 안에서 행하는 여러 일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편협한 관념보다
더 효과적으로 사단이 우리를 미혹하는 수단이 또 있으랴??
온 세상이 다, 주님께 드리는 예배로 충만할 수 있다.
예배는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일터에서,
삶의 현장에서, 거리에서,들판에서도 드릴 수 있는 것이다.'
ㅡ마르틴 루터ㅡ
꼬리말 쓰기
향기 전도사로서 잔뼈가 굵었던 저 역시..제 안에 세뇌된 '잘못된 교회개념'을 성경적으로 고쳐 나가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ing 형) 있음을 고백합니다. [14:41:03]
향기 사람이 모이는 곳마다, (그곳이 어디든지...) 교회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능력... 건물이나 조직에 얽메이지 않는 주예수님의 능력이... 내 속에서 온전히 역사하길 원합니다...우리가 작은 예수로서 빛을 비추게 된다면 넉넉히 가능한 일이라고 믿게 됩니다. [14:23:00]
향기 헌금할 단돈 몇천원의 돈이 없어서 교회에 못나간다는...가난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가난한자.. 병든자..멸시받는자..냄새나는 자들..그들도 부담없이 복음을 접하고 함께 예배드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14:42:06]
solomon 중요한것은 제데로된 말씀이 귀하다는점 입니다. 제대로된 말씀을 가진사람은 교회건물이나 프로그램에 얽메이지 않고 자유하다는 것입니다. 도의초보에 머물러 있는자들을 보면 안타까울 따름이지요. 시대를 거쳐서 사탄이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다는말입니다. 강력한 조직으로 옭아메는것입니다. 이탈자는 원수가 되고 말 [16:35:38]
solomon 지요. 말씀이 마음에 들지 않아 교회를 옮기면 평소에 그렇게 친절하던 교회식구들이 등을 돌리는게 현실 입니다. 왜?다같은 하나님의교회인데 그럴까요? 제대로된 말씀을 접하게되면 그동안 얼마나 한심하게 그곳에서 도의초보에서 맴돌고 있었는지를 어항속 금붕어 보듯이 환하게 보이지요. 그래서 이제는 그리스도를 찾 [16:4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