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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만찬 연구 - Ⅲ. 성만찬 예전의 실천 B. 한국 개신교 공예배에 있어서 성만찬의 갱신 1. 개신교 공예배의 문제점 ② 성만찬 격하의 공예배

호밀64 2012. 6. 26. 09:09

② 성만찬 격하의 공예배
한국 개신교의 공예배가 설교중심예배인 것은 성만찬 격하를 뜻하
고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가 루터나 칼빈도 매주 설교와 성만찬 예배
를 원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많은 개혁 신앙의 대부분의
신조에서는 말씀의 선포 다음에는 언제나 성례전의 올바른 집례가 행
해지는 곳이 교회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그러기에 개혁가들의 절대
수가 매주일의 성례전 거행을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그 존
엄을 높이 인정하면서 성례전을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현장이라는 것에
가장 우선적인 해석을 주고 있었다. 또한 야웨의 공동체요 그리스도
의 지체로서의 당연한 의무이기에 이 예전을 통하여 공동체의 재확인
을 거듭할 것을 촉구했었다. 그러기에 성례전은 매주 말씀의 예배와
병존해야 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회 공예배는 성만찬이 격하된대로 정착되어 있
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의 예배와 성만찬의 밀접한 관계 즉 일원적
인 관계를 알아야 한다. 이 관계는 초대 사도들의 교회의 전통에 속
한다. 즉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는 제자들과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서 회당의 예배, 곧 구약성서를 중심한 설교와 찬송이 주가 된 말씀의
예배(Synaxis)에 참예하였었다. 이 말씀의 예배는 성질상 오늘 우리
들의 교회가 매주일 드리는 예배와 같은 것이었다. 회당의 말씀의 예
배는 제사행위가 없는 것이었는데 제사는 예루살렘 중앙 성전에서만
있었다. ) 이장식, 예배와 성찬의식 , 기독교 사상 1979.2, p.64.

그런데 성만찬의 기원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기 전날
밤 그의 제자들을 모으시고 유월절의 명절을 지켰던 저녁 식탁에서 비
롯되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최후 만찬을 나누신 자리에서 자기의
십자가의 죽음을 떡과 포도주로써 상징적으로 예고하시고 새 언약 또
는 계약을 세우셨다. 그리고 이 성찬식을 행하라고 부탁하셨다. 그
러므로 예수님의 부탁과 명령을 살려서 사도들이 교회를 시작하여 예
배하러 모였을 때마다 성만찬 예식을 거행하고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
였다.
이제 그들은 예배드릴 때 구약을 읽고 설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
지 못함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
며 이 모든 것에 붙어있는 의미의 종합적인 표현이 되는 성만찬 의식
을 집회 때마다 집행하였었다. 즉 그때 성만찬 의식을 빼놓으면 기독
교인의 예배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속
죄와 구원에 대한 새 언약이며 보증이었기 때문이다.
실로 구약과 신약의 차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의 대표적인 사
건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며, 그것의 상징적 의식인 성만찬은
기독교 예배가 유대교의 예배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가 되었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예배가 성만찬을 제외시킨다면 그것은 유대교 회
당의 예배와 유사한 것이 된다. 즉 기독교 예배의 특이성이 없게 된
다는 말이다. ) 이장식, op. cit., pp.64-65.

이에 비추어 오늘의 한국교회가 매주일 드리는 예배 가운데서 성
만찬이 차지하는 위치를 살펴볼 때, 과연 우리는 초대교회가 추구하고
경험했던 그 감격을 소유하고 있는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불행스
럽게도 여기에 대한 답변은 그렇게 긍정적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일년에 한 두번으로 끝나는 성만찬의 회수에서 그렇고, 그
내용에서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회가 갖는 성만찬의 성
례전은 나를 기념하라 는 언어적인 뜻 이상의 신학적인 의미부여에
무관심한 것을 느낄 수 있다. 더우기 그 현장에서 성례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개신교 예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
지 알 수 없는 지극히 형식적 순서로써 끝마쳐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 정장복, 예배학 개론 , pp.181-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