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에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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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참된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고 가르치는 분들이 희귀하여
신학적으로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학 자체가 불완전하거나 무지한 사람들의 주장들이어서
수에 칠 가치가 없습니다.

성경의 계시는 절대적인 것이고 신학적인 해석이나 어떤 학자의 견해는
상대적인 것이니까 어떤 학자들의 말이라도 분별없이 수용해서는 안됩니다.

지금까지 기독교가 소홀히 하거나 등한시 해 왔던 율법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성도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까지도
율법이 주어진 동기와 목적, 더 나아가 율법의 기능과 유익을
거의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서 성도들은 혼란스럽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율법을 성취 하셨다" 말은 성경을 오해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것은 율법을 성취하신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에서 꾸준하게 예언되어 왔던 그 예언들이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율법과 관계 된 것을 성취하신 것이 아니라 예언들이 성취된 것이요,
구약 즉 옛 언약에 내포된 약속들을 성취하셨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율법을 성취하셨으니까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예 말이 되지도 않은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말씀에 대한 오해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은 폐하기 위하여 완성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 혼자 지키려고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율법은 모든 성도들이 그 율법을 지키라고 완성하신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이를 지킴으로써 세상 사람들과 구별(거룩)되게 하시려고
율법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사실 구약성경의 율법을 보면 그 수준이 낮은 수준입니다.
그 이유는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으로는
그 정도 수준의 율법도 지키지 못할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구약의 율법이란 대체로 수준이 낮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의 낮은 수준과 미흡한 부분을
한 단계 더 끌어 올려서 완성을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산상보훈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 고 생각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 ?

율법을 완성하셨다면 이제는 그 율법을 즐거워하고 사랑하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면서 (시편 1편)
최선을 다하여 지키라고 완성하신 것입니다.

율법을 보는 안목이 열리신 분들에게는 율법이야말로
이 땅에서 복을 받을 수 있는 참으로 복된 길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신28:1~14)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사실 기독교가 아니라 기복교처럼 되어
어딜 가든지 그저 오나 가나 그저 복받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그 많은 복들은 레위기에 기록된
여호와의 율례와 계명과 법도를 지킬 때에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결론은 같습니다.
교통법규가 완성되었다면 성실히 교통법규를 지켜야 합니다.
교통사고를 줄여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과 소중한 시간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장하기를 교통법규가 완성되었으니까
이제는 교통법규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람들이 그런 사람을 정신에 이상이 있는 사람으로 여길 것입니다.

자 먼저 예수님의 말씀부터 들어 봅시다 !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요 10: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롬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율법을 보완하여 완성시킨 것은 폐하기 위하여 완성하셨을까요 !?
폐하게 될 율법이라면 아예 완성할 것도 없이 폐하면 그만이었을 것입니다.

초대 교회 시대부터 율법무용론자(말키온 등)는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 시대에도 율법 무용론자들도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생각해야 옳은 것일까요 ?

여기서 우리가 좀 더 성실하게 율법에 대하여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스스로 오해에 휘말려 착각하게 된 것은
바울의 서신들을 오해하게 됨으로써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 즉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율법을 다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믿음으로써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간 후(後)의 이야기입니다.
율법이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가기 전에 지켜야 하는 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그 후에 지키라고 주신 것임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율법을 논하는 사람들은 율법이 처음부터 구원 이전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 구원받는 거룩한 백성답게 사는 원리로써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이란 구원받기 위하여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값없이, 은혜로, 구원받은 후에 그 구원 받은 감격으로
거룩하게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이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삶이 전혀 거룩하지도 않고 선하지도 않고 구별도 되지 않는 것은
그동안 신학자 목회자 성도들 모두고 율법을 무시하고 기복주의와 신비주의적인 미신으로
성도들의 삶이 타락하고 변질되었기 때문에 세상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율법은 처음부터 그렇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 율법이 주어졌던 시점이 애굽에 있을 때가 아니라 애굽에서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받은 후에 시내산까지 와서 주어졌다는 것을 주목해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 율법을 주시면서
"만약 너희가 이 율법을 지키면 애굽에서 구원하여 주리라!"하신 것이 아니고
그냥 유월절 양의 피를 문 인방과 설주에 바르고 그 양의 고기를 먹고
모세가 전한 말씀을 믿음으로 그냥 값없이 구원을 받아 나온 것입니다.

애굽에서 이미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구원받은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어떻게 살면 거룩하게 되는지를 규정하고 가르치는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율법의 기능을 단지 죄를 깨닫게 하였다는 것은
사도 바울의 "결과론적인 해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만 보지 말고 그 율법을 주셨던 원래의 목적,
즉 먼저 그 율법을 주셨던 처음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주셨던 처음의 목적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첫 째, 율법의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둘 째, 율법의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되게 하는데 있었습니다.
셋 째, 율법의 목적은 삶을 얻고 복을 얻게 하는 본된 언약이었습니다.
넷 째, 율법의 목적은 거룩하게 살아서 선교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섯째, 율법의 목적은 생명과 평강이 보장되는 복된 언약이었습니다.
여섯째, 율법의 목적은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일곱째, 율법의 목적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오경을 제대로 읽으면 그냥 훤히 보이는 내용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최소한 7년마다 한번씩
성경을 통독하면서 가르쳐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게 하라 하시는 말씀을 소홀히 하여
율법을 전혀 지키지 못했고 따라서 결과론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하게 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복되게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삶을 얻고 복을 얻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선교는 고사하고 오히려 선교당하고 말았습니다.
생명과 평강은 고사하고 고통과 사망을 겪었습니다.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배울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독사의 자식들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그렇게 된 율법을 결과론적으로만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악하고 얼마나 어리석으며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따라서 스스로 큰 죄인됨을 깨닫고
"우리가 어찌할꼬"할 때 구세주 예수님께서 오셔서 죄인들을 부르셨으니
오히려 그 율법이 죄인들의 죄인됨을 깨닫게 하는 것이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단지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만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구약시대에 거룩한 사람들은 율법을 즐거워하면서 지켰습니다.
성경은 그러한 사람들을 성경은 언제나 의인으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대 즉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한 사람들을 의인으로 부르시는 것이
잘 못된 것이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이라는 언약을 맺을 때 그 언약을 지키면 복을 받을 것이고
만약 배반하여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으로 언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율법을 보고 하나님을 믿었다면
복을 받고싶은 마음에서라도 율법을 지키려 했을 것이고
반대로 저주 받을 것이 두려워서라도 율법을 지키려고 했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복 받을 것을 믿으면서 지킬 것이고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으로 믿어
두렵고 떨림으로 율법을 지키려 할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

율법을 지킨다 해도 복 주실 것 같지도 않고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저주같은 것은 받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사람을 우리는 불신자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원리는 그 때나 지금이마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느냐 하면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전혀 사람의 행위에 달린 것도 아니고 율법을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후에는 성실히 율법을 가르쳐서
배우게 하고 지키게 해야 성도들의 삶이 거룩해지고 복을 받게 됩니다.

율법의 정신을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며
우리가 건전하고 건강하게 위생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
거룩하게 되고 복된 삶을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우리가 지켜야 하는 율법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키던 수준의
불완전한 율법이 아니라 거기에 예수님의 교훈 즉
더 완전케 하셔서 완성시키신 완전한 율법을 가르치고 지켜서
우리의 삶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성도들의 삶이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바램이고 교훈이고 명령입니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5:46-48)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者)를 사랑하면
무슨 상(賞)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兄弟)에게만 문안(問安)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異邦人)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穩全;perfect)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穩全;perfectly)하라

그러나 구약의 여러 율법서 중에서 폐하신 율법이 있기도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많은 목사님들이 바르게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폐해진 율법과 폐하지 않은 율법은 간단하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첫째, 모형(Symbol)으로 혹은 형상(Image)으로 지키던 율법은
실상(Real image)이 오게 되면 폐지하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자면 동물들 즉 양이나 소나 염소로써 드리던 제사는
폐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모형으로 드리던 것인데 실상으로써
예수님께서 희생하신 후에는 영원히 폐하게 되었습니다.
육체에 행하던 싸인 즉 할례의 경우는 마음의 할례 즉 세례가 오니까
폐해진 것입니다. 그 외 유대지방의 문화 안에서 임시로 주어졌던
관습법들 중에 수혼법이라든지 기타 몇 가지는 폐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폐하지 않는 율법이 있습니다.
윤리와 도덕적인 율법은 모형이 아니라 실제적 삶의 윤리이기 때문에
영원히 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음식물 규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 시대 유대인들이 음식을 먹는 것은 모형으로 먹은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건강과 위생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율법이기 때문에
역시 사람이 육체를 가지고 사는 모든 날 동안 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오늘날 유대교 신자들과 몰몬교 신자들과 안식교 신자들이
우리 기독교인들보다 건강하게 사는 것을 보시면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무시하거나 폐하신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그 율법의 정신을 벗어난 미드라쉬 탈무드나 미쉬나 게마라 토?타 학가다 등
과잉해석 되어 율법의 정신을 크게 훼손한 유대교 장로들의 유전을
무시하셨고 지키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어설픈 학자들이 율법무용론자처럼 가르쳐 온 것은
구약도 신약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잘 못 가르쳐 온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 이렇게 주장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크게 혼란스러워할 것은 자명한 노릇입니다.
그만큼 우리 목회자들이 성경을 바르게 배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글을 몇 차례 더 정밀하게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마 7:24-27)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行)하는 자(者)는
그 집을 반석(磐石) 위에 지은 지혜(智慧)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柱礎)를 반석(磐石)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行)치 아니하는 자(者)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율법을 가르치지 않고 성화의 과정을 무시하고 방자하게 나아가던
저 유럽의 교회들이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산상보훈이란 불신자를 위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 즉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신앙과 생활이 산상보훈을 지키지 않으면 윤리적인 삶이
근본부터 흔들리게 되고 레위기에 있는 음식물 규정을 무시한 결과는
오늘날 성도들의 건강이 급속히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하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사랑하기를 제몸 같이 하고 있다면 율법 중에 최고의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의 자세는 그 인격의 윤리적인 측면에서 건전한 것이지만
육체적인 건강을 위해서는 음식물 규정과 위생법을 지키는 것이 건강을 지키는 길입니다.

이 주제는 오늘날 대부분의 목회자 혹은 신학자들이
바르게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솔직한 현실입니다.

율법을 성실하게 지키는 유대교 신자들과 안식일 교회 신자들 그리고
몰몬교 신자들의 삶은 확식히 세상 사람들보다 거룩하고 경건합니다.
반면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생활은 어디서도 경건한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다고 책망을 하셨는데
오늘날에 와서는 경건의 모양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모형으로 제정된 율법은 실상이 오면 당연히 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형적인 율법이 아니라 실제로 행할 것을 규정한 율법은
영원히 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면 스스로 분별할 수 있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을 수 차례 더 읽어 보시고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으면
에스라 성경강좌 풀 코스에 참석해서 강의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숲속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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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石 蘭(석 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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